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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3호

 

가정에 대하여 (II)
정병길  

 

10. 배우자 선택의 첫 조건


하나님께서 이같이 고귀하고 영광스런 사명을 인생에게 주시고 가정을 인생이 받은 그 거룩한 사명을 수행할 기관으로 세우신 것이다. 따라서 가정은 그 사명을 수행해 나갈 때야 비로소 그 설립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당시 아담은 오늘날의 우리와는 달리 죄가 없는 온전한 상태의 사람이었지만 그 짝과 연합하여 거룩한 사명을 이루어 나가도록 돕는 배필을 지어주신 것이다. 동물이 아닌 사람,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짝이 되어서 동등한 수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인격과 거룩한 지식이 장성하여 더욱 바르게 사명을 수행토록 하신 것이다.


가정은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제일로 삼는 곳이 아닌 것이다. 누구든지 가정을 세우려는 사람은 이 점을 분명히 생각하여 자기의 배필을 구해야 한다. 재산, 학식, 외모, 연령차, 성격, 심지어 사랑, 그 어떤 것도 혼인의 대상을 생각하는 제일의 조건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에 앞서서 기본적으로 그가 건전한 신앙의 소유자인가? 중생자인가를 확인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 신령한 것을 분별치 못하는 사람과 어찌 사명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며, 사명에 대한 각성이 없는 가정을, 그 가정이 외견상 아무리 좋아 보여도, 어찌 좋은 가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혹자는 불신자라도 결혼한 후 전도하면 된다고 할지 모르나 그런 생각은 불신앙적이다. 그런 신앙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순전한 복음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성신으로 그것을 잡아 쓰셔야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절대의 주권으로 재창조의 일을 그 복음 안에서 행하시지 않으면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은혜 받은 일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해야 할 일이지 개연성만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도 일종의 불신인 것이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든지 노아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외모에 빠져 혼인하고 나가다가 결국 그 시대의 복음을 보존하는 기관이 사라지고, 악이 창궐하므로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땅을 심판하셨던 일을 만대의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11. 올바른 인생관


누구든지 가정을 세우려는 사람은, 혹은 세운 사람은 가정이란 행복의 추구나 증진을 위한 사회가 아니라 사명을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인생을 권고(眷顧)하시사 세우신 기관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점이 가정에 대하여 생각해야 할 가장 기본적 사항이다. 이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비로소 가정에 대한 바른 뜻을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은 누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사람인가? 에베소서 2:10에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함을 받은 자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범죄함으로 전적으로 부패하여져서 그 언행심사가 모두 다 비뚤어져서 어떤 노력을 하여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고상하게 보이고 고귀하게 보이는 선미(善美)라 할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더러운 누더기와 같은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함을 받아 성신을 의지하여 새사람으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려면 첫째 하나님과 인생으로서 정당한 관계를 수립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항상 중요한 일이고, 또 그런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지금 이 세대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곧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인식이 있어서 거기에 발맞추어 뜻을 같이 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정당한 관계라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성경 묵상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며 경건의 생활을 힘써서 도덕적 완성을 힘쓰면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인생과 정당한 관계를 맺기 위하여서 세우신 제도를 바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우셨고 그를 통하여서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성신 안에서 바른 기독론을 가져야 할 것이며 그 기독론 하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신에 대한 지식이 심오해져야 하는 것이다. 다음 이 기독론은 바른 교회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주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고 성신을 주셔서 거룩케 하시며, 만대에 걸친 그 모든 지체를 한 생명으로 통일시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온전하고 충만하게 나타낼 기관으로 세우신 사실을 깨닫고 자기도 그 교회의 한 지체로 바르게 서가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정당한 교회론을 수립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라는 존재가 나라는 개체로서, 보다 높은 가치와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이 거대한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을 위한 분자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의 각성과 그렇게 존재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12. 돕는 배필


이러한 목표로 세워지는 가정은 거기에 연합하는 일이 있고 또 독립하는 일이 있다. 창세기 2:24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다른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연합하여 가정을 이룬다. 이 연합을 성경은 말하기를 “둘이 한 몸을 이룬다”고 하였다. 가정이란 조직이나 단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유기체로 긴밀하게 합해지는 것으로 말하였다. 어떻게 이런 연합이 가능한가? 혹자는 사랑을 말하기도 하고, 상호 이해를 말하기도 하고, 정조를 말하기도 한다. 그런 것이 모두 다 가정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덕목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만을 생각한다면 인간적인 상식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가정이 유기체로서 연합하도록 하나님께서 부부의 도리를 내셨다. 누구든지 가정의 존재의 목적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내신 부부의 도리 위에 굳게 서야 비로소 유기체적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이 부부의 도리에 대해서는 훗날 바울 사도가 전해 준 계시 속에 명확히 들어 있다. 거기서 각각 남편의 길과 아내의 길을 말하고 있다.


먼저 아내들에게 말씀하신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부부지간에 있어서 아내에게 요구되는 원덕(元德)은 복종이라고 가르쳐 준다. 왜 복종해야 하느냐면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라”(엡 5:22). 하나님께서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가장(家長)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가장에게 복종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서차 있는 사회로 만드셨다. 남자나 여자나 자유자나 종이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다 동등한 인격체로 보신다. 그러나 가정을 세울 때는 가정을 그 질서상 서차 있는 사회로 만드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작정과 지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창 2:21,22; 딤전 2:13; 고전 11:8,9) 아내로서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영광스러운 것이다.


오늘날 무조건적 평등을 실현해 보려는 맹신을 가진 사람들은 이 같은 교훈에 반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바 그 능력과 기질이 다양한 이 세상 사회에 어떻게 희랍적 의미의 공평을 실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 실현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차서 있는 사회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로 계시는 성삼위 하나님의 사회는 어떤가? 성부 성자 성신 하나님께서는 일체이시고 동등이시지만 차별이 아닌 차서가 있으시다. 아들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보냄을 받고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즐거이 그 뜻을 행하셨다. 또 성신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에게 나와서 자의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일을 가지고 말하시며 그 뜻을 구원의 역사에 적용하시는 것이다. 부부간에 이루는 사회도 이 거룩한 사회와 방불하게 차서가 있는 것이다. 여자가 돕는 배필로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남편에게 복종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아름다움이요 명예가 되는 일이다.
그런데 여기의 복종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해 나가는 큰 원칙 안에서 복종하는 것이다. 때때로 남편이 잘못 인도하면 온유한 말로 충고하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도 있어야겠지만, 하나님을 거스려 가도 그냥 따라간다면 그것은 맹종이요 묵종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라 칭한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어떤 일에는 아브라함보다 더 예리하게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그에게 고언을 하기도 했다(창 21:1). 여기에 돕는 배필의 그 도움이 있다. 죄악을 짓는 일에 순복하라는 것이 아니다. 대전제는 하나님을 믿고 순복하는 것이다.

 



13. 남편의 길


다음은 남편이 연합을 위하여 취하고 나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신 것이 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남편의 도리는 아내를 전적으로 사랑하는 데 있는 것이다. 자기가 가정의 머리라고 군림하려 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이란 항상 바른 지식을 수반해야 참다운 사랑이 되는 것이다. 가장으로서 이 가정이 나가야 할 지표가 무엇인지 바르게 파악하고 거기에 흔들림이 없이 나가야 한다. 거기서 비꾸러지면 사랑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다. 아담은 계시의 전달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하와와 함께 망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남편의 사랑에 대한 본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였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도록 사랑하고 그로써 교회를 하나님 앞에 흠 없는 거룩한 존재로 세우시는 그런 지식과 능력 있는 사랑을 베풀지 않으셨는가? 남편 된 자들로서는 이 같은 모본 앞에 차라리 외포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니라.” 아내는 제 몸이니 자기의 신체적, 지적, 영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각자가 스스로 거의 본능적으로 노력하는 것같이 아내에게도 제 몸에게 하듯 그런 것들을 그렇게 채워 주라는 말씀이다.

 



14. 둘이 한 몸을 이룸 - 연합 -


이런 부부의 도리를 충실히 성신 안에서 지켜 나가면 유기체적인 결합을 이루게 되는데 이런 도리는 다수 간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단 둘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엡 5:31)라고 하셨는데, 말라기 선지자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풀이하고 있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말 2:15)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여럿 지을 힘이 없어서 오직 아담을 위하여 하와 한 사람만 지은 것이 아니라, 1남 1녀로 가정을 세우시려고 한 여자만을 지었고 그 가운데서 경건한 자손을 얻으려 했다는 말씀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 대하여, 한 여자가 한 남자에 대하여 동정과 정조의 순결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이고 한쪽이 죽었다든지 혹은 간음을 범하고 다른 데로 나갔다든지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어떤 경우든지 이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범죄하는 일이 된다(마 5:32; 막 10:12; 마 19:9). 또 만부득이 갈리는 일이 있다면 재혼하지 말고 그대로 지내는 것이 좋고, 만일 그가 다시 가정을 이루려면 그 헤어졌던 사람과 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전 7:10,11). 그러나 그 한편이 다른 사람에게 시집이나 장가를 갔다가 어떤 사정으로 다시 홀로된 경우라면 그 경우에는 다시 합하는 것이 불가한 일이 될 것이다(마 5:32). 이와 같이 오직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므로 배우자에 대하여 순결을 지킨다는 것은 언제든지 중요하다. 즉 혼인 후는 말할 것도 없고 혼전에 보존하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다.

 



15. 부모를 떠남 - 독립 -


가정의 제도 안에서 이 연합과 아울러 중요한 것은 독립이라는 문제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창 2:24).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엡 5:31). 사람은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양육을 받아 성년이 된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면, 가정의 목표가 하나님 앞에서 그 가정으로서 독특한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제는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정신적, 신앙적, 물질적으로 스스로 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독립된 존재로서 자신들을 드리고 살았던 것처럼, 새 가정을 이루는 자식들도 하나님 앞에 책임 있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발휘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로서 제사장적 역할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셨지 야곱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하나님, 혹은 할아버지의 하나님으로만 계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땅에 내시고 가정을 세워 주셨을 때에는 그 사람과 그 가정에서 거두시려는 것이 있으므로, 언제까지든지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로만 살도록 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 점을 부모와 자식 모두가 염두에 두고 그 원칙 안에서 지혜를 내야 할 것이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룬 자식으로는 이제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인식하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부모를 떠나 독립하여 배필과 합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런 의식과 준비와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독립하여 가정을 이룬 자식들로는 이제 제 발로 서가야 할 것을 생각하고, 매사에 더욱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부모에 대해서는 늘 감사하고 존경하기를 그치지 않고 또 부모에게는 노인의 지혜가 있음을 인정하고 부모의 조언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부모로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주장하실 것임을 믿고 내보내야지 독립한 자식에게 대해서 계속 간섭한다면 부당한 일이다. 자식들에게 쓰라린 경험이 있을지라도 그들의 주가 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들의 자율적 의사를 존중해야지 전처럼 부모의 권위로 주장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아들은 이제 며느리의 남편이요, 며느리는 아들의 아내이므로 그들 상호간에 우선권이 있음을 인정해야지 그 틈을 부모가 비집고 들어가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16. 온전한 가정


부부가 가정의 도리를 좇아서 바로 서야 완전한 가정이 된다. 자식이 없는 가정을 결손가정이라 하지 않는다. 부부지간에 이상(異常)이 생기면 그것은 결손가정이다. 이러한 부부로 이루어진 가정에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면 그 가정의 풍성함이 드러나는데, 가정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자녀 교육도 그 출발점은 정당한 부부 관계이다. 부부가 그 도리를 바르게 수행하고 나가면 자녀교육이 절반은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 유여할지라도 한 여자만 만드신 것은 그 가운데서 경건한 자손, 자기 백성을 얻으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인생을 위하여 이런 고상하고 거룩하고 복된 제도를 내시고 그 제도에 적합하게 인생을 지으시고 또 그 제도 안에서 마땅히 행할 길을 보이신 것이다. 이처럼 높은 가정의 가치를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 정조 지키는 일의 엄격함을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마 19:10). 그같이 높은 수준을 사람의 힘으로는 지켜낼 수가 없음을 바로 본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혼인한다는 것이 범죄에 빠질지도 모르는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모든 계명이 그렇듯이 자연인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로 보면 이 제자들의 반응은 차라리 솔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지킬 수 없는 제도나 계명을 주시는 일이 없다. 성신으로 다 이루도록 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이 이후에 어떤 가정생활을 영위하였는지 성경은 침묵한다. 그러나 성신을 의지하고 살았던 제자들이 교회의 터로서, 사도직을 수행하는 그 분주함 속에서도 이같이 높은 가정의 이상을 능히 실현하였음을 보여 주는 성경 말씀 한마디를 우리는 보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고전 9:5).


가정을 이루는 일은 구원의 일이고 성신을 의지하여서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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